만인에게 평등한 환경호르몬···피할 방법이 없다
너무 흔해서 잊고 사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환경호르몬입니다. 지난번 유자학교 편에서도 어른들이 만든 칠판과 지우개가 아이들에게 환경호르몬을 끼얹고 있다는 이야기를 썼었는데, 사실 그 이후로는 잊고 살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래 세대들을 위해서라도 유해물질을 줄여나가야만 한다는 건 외면할 수 없는 사실. 최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김원 박사님을 만난 이유입니다.
◆환경호르몬이란
우리 몸의 밸런스를 유지해주는 호르몬을 흉내낸 외부 화학물질입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과거 살충제로 썼던 DDT. 살충제를 맞은 곤충을 먹은 물고기가 죽고, 그 물고기를 먹은 새가 죽는 일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대부분의 환경호르몬은 당장 생명을 죽이지는 않지만, 성기능이나 생식기능의 이상, 당뇨, 비만, 암 등을 야기합니다. 특히 어른보다 아이들이 환경호르몬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에 경우 아토피·ADHD·성조숙증 등으로 고통받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태아-영유아-청소년 순으로 취약하고 똑같은 수준의 환경호르몬에 노출돼도 아이들은 어른 대비 2,3배 높은 수치가 나온다고 합니다.
참고로 환경호르몬의 정식 명칭은 내분비계교란물질. '환경호르몬'은 더 이해하기 쉽게 일본에서 지은 이름입니다.
━환경호르몬 없는 식탁, 가능할까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이달 초 '환경호르몬Free 가족캠프'를 열었습니다. 충남 공주의 한 연수원에서 각 지역 참여 가족들이 모여 환경호르몬이 덜한 샴푸를 쓰고, 역시 환경호르몬이 덜한 음식을 먹으면서 캠프 전후의 소변검사를 통해 유해물질 수치를 조사한다는 컨셉트였습니다. 배달음식 용기, 화학물질인 샴푸, 일회용품 등에 환경호르몬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전후 수치 차이가 제일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사님께 여쭤봤는데, 아쉽게도 이번 조사 결과는 10월 말에나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작년에는 생활 조건을 통제한 캠프가 아니라 각자의 가정에서 일상을 이어가면서 전후 수치를 비교하는 '바이오 모니터링'을 했는데,전후 수치 차이가 미미했다고 합니다. 김 박사님은 "바이오 모니터링의 경우 가장 중요한 음식을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환경호르몬의 90% 정도는 음식을 통해 인체에 유입되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올해 캠프의 식단을 짜려고 식품 360종을 분석했는데, 분석해보니 거의 모든 식재료에 폴리염화비닐(PVC·가방, 바닥재, 매트, 튜브, 포장재, 비닐랩 등 다양하게 쓰임)을 만들 때 쓰이는 '프탈레이트'에 오염돼 있었다고 합니다. 육류뿐만 아니라 야채, 과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유통 경로가 짧은 로컬 식자재는 환경호르몬이 덜 검출될 것'이라는 가설을 갖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틀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탈출구가 없다’
전문가들조차 환경호르몬에서 자유로운 음식을 찾을 수 없었다니, 이게 무슨 절망적인 이야기란 말입니까. 김 박사님은 "우리가 PVC를 이미 너무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프탈레이트가 물, 토양, 공기까지 오염시켰고 이제는 누가 식품에 프탈레이트를 억지로 넣지 않아도 제조, 생산, 가공, 유통 단계에서 계속 오염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프탈레이트는 지방에 잘 녹는 성분이라 원래 육류나 유제품에서 많이 검출되는데, 채소조차도 질 수 없다는 듯 프탈레이트에 오염돼있다고 합니다.
김 박사님은 "그래서 어디서 식재료를 구하라는 팁을 드리기가 어렵다"고 미안한 듯(!)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연구소도 캠프 참가자들에게 생협 식자재, 로컬푸드 같은 환경호르몬 탈출 팁을 전달할 계획이었는데, 실제 분석 결과를 보니 생협·대형마트·온라인 전부 비슷해서 계획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김 박사님은 "농부 분들께 물어봤더니 농가에서 쓰는 비닐, 플라스틱이 너무 많기 때문에 농사가 시작되는 단계서부터 오염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유기농'이나 '무농약'은 어떨까요? 여기에 대해서도 김 박사님은 회의적이셨습니다. "유기농, 무농약을 하려면 제초제를 안 써야 하는데 그러려면 잡초 등을 막기 위해 비닐을 많이 써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360개의 식자재 중 아무런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은 식자재가 딱 2개, 인삼과 자두였습니다. 인삼과 자두 자체의 요인이라기보단, 특정 생산자들 덕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 생산자들을 조사하고 안전한 식자재 유통망 리스트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박사님의 계획입니다.
━PVC 금지? 환경호르몬 없는 급식?
식자재는 그렇다치고, 샴푸나 치약 같은 생활화학제품들은 어땠을까요. 다행히 우리나라는 애초에 식약처의 기준치가 전 세계적으로도 높은 편이고, 특히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로 국민들의 의식이 높아지기도 했고, 생활화학제품들은 전성분표기가 의무라 박사님 입장에서는 환경호르몬 없는 제품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소비자가 직접 찾기는 어려울 것"이란 말씀. 100개도 넘는 성분들이 뭔지 일일이 기억하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향이 없는 제품, 파라벤 없는 제품 등 유해물질을 뺐다고 강조하는 제품들을 믿고 사면 된다는 팁을 주셨습니다.
녹차, 버섯, 아몬드, 알로에 과일 등이 환경호르몬 배출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어떨까요. 박사님은 근거가 없어 보인면서 "이들 식품이 이미 환경호르몬을 함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사님은 (식품, 제품 등의)'수제'란 수식어를 믿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제조자들이 모든 소재와 성분을 확인해줄 수 있으면 믿어도 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이상, 환경호르몬을 법으로 제재하면 모두가 더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 박사님은 "다행히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에 따라 프탈레이트 7종을 규제하고 있긴 하지만 수백 종의 프탈레이트에 대해 전부 유해성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머지 프탈레이트의 안전성은 확신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2030년까지 아예 PVC를 금지하고 그 때까지 꾸준히 연구개발을 해서 대체소재를 찾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대안이 제시될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법과 규제를 만들 수 있도록 시민 의제로 만든다는 것이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목표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 무농약 식자재를 공급하는 시스템이 이미 갖춰져 있는 것처럼, 환경호르몬 관리를 받은 식자재를 급식으로 공급할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겠죠.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2022년부터 카카오 브라이언임팩트재단을 받아서 시민들과의 바이오 모니터링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습니다. 올해로 지원이 끝나서 내년 프로젝트의 향방은 아직 불투명한 상태. 이런 연구와 제안이 꾸준히 이어질 수 있도록 관심 가져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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